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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나를 심하게 짝사랑해 준 여자가 있었다. L 양이다. 나는 의사라는 직업상 많은 여성을 1:1로 만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진료업무의 결과는 대개 좋다. 그래서 이런 여성들은 나의 열렬한 후원자(팬:fan)가 된다. 간혹 이 후원자들은 우리 동네의 구의원 , 구청장 등의 지방선거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집단이 되기도 한다. 이 수많은 후원자들 속에서 간혹 '옥의 티'가 생긴다. 나를 짝사랑하는 여인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후원자들은 1991년 부터 갑자기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큰아들 녀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당시의 C 교장선생님은 나보고 육성회장직을 부탁하였다. 아들 교육을 잘하기 위한 일이기에 맡을 수 밖에 없었고, 그 후 4년 동안 육성회장직을 무난히 수행한 것이 수많은 학부모였던 여성후원자들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단체 속에서 공적(公的)으로 인간관계를 맺었던 후원자들의 자그마한 관심이 모여 내가 근무하고 있는 강동성심병원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들 여성후원자들의 주위에 환자가 발생되면 우선 나와 상담(相談)을 하게 되고, 그 환자를 가장 잘 진료할 수 있는 전문의에게 곧 의뢰하기 때문이다.

육성회장직의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하여 각종의 위원회 등에서 공적(公的)으로 일을 할 때에는 별로 사적(私的) 감정이 생기지 않으나, 회식을 한다거나 1박2일의 세미나기간을 같이 지내면 사적인 호감 (好感)도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을 위원회의 위원으로, 후원자로 , 환자의 보호자로 또는 환자로 만나다 보면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에 닿는 적도 생긴다. 보통의 짝사랑은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서 세월이 좀 지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이 그 통상의 과정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짝사랑을 한다거나, 그 짝사랑의 여파로 주위사회 (周圍社會)에 작은 물의(物議)를 일으킨다면 짝사랑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정신의학적 문제의 일종인 편집증(偏執症: paranoia)환자로 생각하여야 한다.

나를 가장 심하게 짝사랑해 준 여성은 L 양이라는 서울의 모 양장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1978년 당시 22세(1956년생)의 여성이었다. 1978년 12월 성탄절을 앞둔 요즈음( 12월 )과 같은 계절의 일이다. 서울의 Y 교회에서 신자들이 버스 5대에 나누어 타고 내가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전방부대를 방문하였다. 당시에 군목(軍牧)으로 근무하던 K 목사님은 28세(1950년생)의 총각이었는데 자기의 모교회(母敎會)에서 오는 방문단 버스에 승차하여 안내장교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버스의 안내장교로는 부대대장, 인사장교, 정훈장교, 군의관이 단골로 동원되었다. 그런데 내가 안내장교가 된 버스의 방문단원은 다 여성청년회 회원들이었다. 오랫만에 아리따운 아가씨들 틈에 청일점 (靑一點)으로 끼일 수 밖에 없었던 나는 그날엔 일상의 군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여러 번 안내장교를 맡아 본 경험이 있었기에 안내문의 레퍼토리를 외우고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부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신 형식 중위입니다. 우리 부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부대는 최전방 철책선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고 저는 이 부대 병사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습니다.------(이하생략) " . 버스를 타고 취사장에 있는 커다란 솥과 밥주걱으로 쓰는 삽을 구경시켜 주고 , 의무실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병(患者兵)들과의 짧은 면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커다란 대포, 탱크등 서울에서는 전혀 볼수 없는 병기(兵器)들을 보여 탄성을 지르게 하고 , 버스에 싣고 온 각종의 선물박스를 내려서 쌓아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나서 버스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통상의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방문단원 중 한사람인 L 양이 나에게 총각인지, 유부남인지 대답해 달라고 했다. 나는 총각이라고 했고 , 부대주소를 알려달라 해서 아무 생각없이 부대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런 며칠 후 L 양이 보낸 편지가 도착되었는데 , 예쁜 편지봉투에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편지지에 상당히 정성을 들여 쓴 것이었다. 내용은 ' 신 군의관님 , 지난 번 전방부대 방문때 보여 준 친절한 안내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국토방위의 업무에 충실해 주시길 후방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라는 평범한 편지였다. 나의 답장도 의례적인 것이었고 서너 번의 평범한 내용의 편지가 오간 후에 새 봄(1979년 4월)이 왔다. L 양이 쓴 나에게 면회를 오겠다는 내용이 담겨진 편지가 도착되었다. 면회를 오는 것에 응대는 해 주겠다는 약간은 냉담한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면회시에 조금 냉담하게 대하니까 , L 양은 한달에 한 번 쯤은 K목사님의 군인교회로 예배를 보러 왔다. K목사님도 총각이었으므로 1:1로 L양을 대하기가 곤란했기에 서울에서 온 손님인 L 양과의 식사대접에는 내가 끼어 줄 것을 번번이 부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L 양에게 위경련(胃痙攣)이 일어 났다.

L 양이 심한 복통으로 아파하기 때문에 군의무실의 군의관실을 개조하여 특실(特室)을 만들어 입원시켰다. 위경련치료제가 주사로 들어 갔고 , 링게르도 꽂아 주었다. 믿을 만한 W위생병을 환자 당번병으로 임명하였고 D위생병에게는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체온 , 맥박 , 혈압 을 체크해야 하는 간호업무을 맡으라고 하였다. L 양의 병세는 호전되어 그 다음날 퇴원하였다. 그로 부터 몇 주후 L 양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부대 근처로 왔다.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한 턱 내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L양에 대한 본격적인 경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후 L 양은 자기의 위경련을 적시에 치료해 준 의사로 신(神)이 보내어준 분이라고 나를 극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항상 '의사라는 본연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니 너무 과찬하지 마십시오' 였다.

L 양은 그 후 여러 번 아예 대놓고 ' 사랑하고 있다' 고도 하였고 , ' 결혼하고 싶다' 고도 하였다. 그래서 K 목사님과 나는 이런 L 양을 설득시키느라고 무척 많은 시간을 없애야만 했다.

짝사랑이란 편집증 환자로서의 L 양이 만들어 낸 주위사회에 대한 물의 (物議)는 K 목사님과 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사소한 것에 그친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성탄절을 앞둔 계절이 되면 자기 인생의 전부를 나와 함께 설계하려 했던 짝사랑이란 편집증에 이환(罹患)되었던 L 양이라는 잊을 수 없는 환자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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