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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환자가 되어 보니

의사도 한 번 쯤은 환자가 되어서 환자의 고통을 실제로 느껴 보아야 더욱 환자에게 다가가는 멋있는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 환자가 되는 것도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한림의대 H 교수는 자신의 몸속에 실험적으로 기생충을 만들어서 그에 대한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반응을 실제로 연구해 보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 H 교수의 몸속에는 기생충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렇듯 자기 자신을 환자로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1978년에 생명이 없어질 뻔한 급성 복막염 환자가 된 적이 있어 환자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1978년 당시 나는 군의관 2년차로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 에서 ○포병대대 의무실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에 26세였는데 지경리에는 의원(醫院)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군의관들 숙소에는 퇴근후 몇몇의 환자들이 진료를 받으려고 찾아 오곤 했다. 그런데 군의관의 신분으로서는 동네의 주민들을 진료해 주고 돈을 받을 수 없었다. 돈을 받으면 서슬이 시퍼런 보안부대에 불려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군의관들은 군규정상 대민진료(對民診療)를 의무적으로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진료를 받은 주민들은 무료로 진료해 주는 군의관들을 무척 고마워 했기 때문에, 나는 저녁식사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거의 매일 저녁마다 환자였던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잘 차려놓은 잔치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8일 이었다. 그날도 저녁식사를 잘 얻어 먹고 숙소로 돌아 왔다. 저녁 9시 쯤 부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소화불량증일 것이라 생각하고 소화제를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밤이 깊어 질수록 명치끝도 아파지기 시작했다. 다른 군의관을 깨워서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당장 아픈 배를 움켜쥐고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숙소 주인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의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날 밤은 한잠도 못 자고 10월 9일 새벽이 되었다. 심하게 아프던 명치 끝의 배는 안 아프게 되고 통증은 오른쪽 아랫배로 옮겨가 있었다. 교과서에 쓰여져 있는 급성 충수돌기염 ( 급성 맹장염) 의 통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이 그대로 ' 내 몸안에 있소이다.' 라니-------.

10월 9일은 한글날로 휴일이다. 부대의 정규업무는 쉬고 있었기에, 당직사령에게 내 사정을 얘기했다. 그날의 당직사령은 군의관이 병(病) 때문에 후송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니 대대장님의 결심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고 대대장님께 전화로 보고하였다. 내가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군인들 중에 후송을 가야할 병이 생기면, 나는 재빨리 앰뷸런스를 움직여 병의 초기에 응급수술을 받도록 했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아프니 나를 야전병원으로 옮겨주는 일을 서둘러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앰뷸런스의 환자석에 내가 타고 가야 하는데, 앰뷸런스의 선임탑승자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군대에서는 모든 차량은 그 차량이 어떤 것인가를 불문하고, 운전병 혼자서는 운행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항상 차량을 지휘하는 선임탑승자가 있어야 한다. 대개는 중사 이상의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 자격이 있다. 휴일이 아니면 선임탑승을 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겠으나 그 날은 한글날이어서 외출한 장교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내었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군수장교 L대위에게 선임탑승을 부탁하여 야전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L 대위의 역할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래서 20년이 지난 요즈음도 나는 L 대위와 가끔 만나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담소하고 있다.

내가 앰뷸런스의 환자석에 누워 후송행을 하다니-----.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다. ' 신(神)이시여, 이게 꿈이라면 빨리 저를 깨게 해 주소서' 라는 기도도 하였다.

앰뷸런스 속에서 오른쪽 아랫배의 통증이 약간 덜 아파지는 때가 있었다. 이는 충수돌기가 고름으로 팽창되어 터질 때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 『 터지는 충수돌기염은 아닐 것이다. 아마 오른쪽 아랫배가 이렇게 아픈 것은 어떤 장경련 (腸痙攣)의 현상으로 통증이 있다가 이젠 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경련이라면 야전병원에 갔다가 항경련제 주사 한 대 맞고 그대로 이앰뷸런스를 타고 귀대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별 것 아닌 일 가지고 호들갑을 떨어 부대를 떠들썩하게 한 것이 못내 미안하고 더욱이 선임탑승해준 L 대위는 무슨 면목으로 다시 보나? 』라는 완전히 본인중심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 왔다. 그리고 한시간 쯤 지나갔다. 이번에는 뱃 속의 전체가 다 아파지기 시작했는데 그에 더불어 복부근육의 근육강직(muscle guarding)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복부근육의 근육강직은 급성복막염의 객관적인 징후이다. 이때의 통증은 나를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다는 기세로 괴롭혔다. '선생님, 내 배가 너무너무 아프니 제발 빨리 진통제를 놓아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보채던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리 뒤척여도, 저리 뒤척여도, 앉아보아도, 엎드려서 웅크려 보아도 도대체 통증은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꼭 물에 적신 수건을 쥐어 짤 때 , 수건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 그 당시의 내가 겪은 고통이었다.

○ 야전병원의 응급실에 도착되었다. 때마침 당직군의관은 학교 선배이신 P 군의관이었다. "무슨일이니?" 라고 선배님은 걱정스럽게 물어 봐 주었다. "내가 아뻬에 걸렸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아뻬' 라는 한 마디로도 의사들끼리는 잘 통한다. '아뻬'는 appendicitis (충수돌기염)의 첫 두음절을 일컫는 것이다. '아뻬'라는 말을 듣고 말초혈액 백혈구수 검사가 응급으로 시행되었다. 대개의 정상인들은 1mm3의 혈액에 7,000 개 인데 , 10,000 개를 넘어서면 수술의 대상이다. 내 검사결과는 33,000 개였다.

수술실로 들어 갔다. 본 마취에 앞서서 속효성(速效性) 수면제인 소듐 펜토탈이 정맥주사되면서 간호장교는 하나, 둘 , 셋, 넷을 세어 보라고 하였다. 일곱까지는 세었으나 여덟부터는 전혀 기억이 없다. 수술은 잘 되었고, 고생은 하였지만 한 달 정도 입원한 후 원대복귀하였다.

야전병원의 장교병실에 외로이 눕게 된 처지가 마냥 슬퍼졌다. 수술후의 병명인 「 급성 괴사성 충수돌기염으로 인한 천공, 그리고 이차성 급성 화농성 복막염 」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나를 따뜻하게 간호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나의 외로움을 더해 주었다. 그 때까지 주장했던 '여자는 아무 필요 없다. 남자도 독신으로 얼마든지 일생을 홀가분하게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다' 는 생각은 이 때 깨끗이 사라졌다. 옆 침대의 장교는 부인이 갖은 수발을 다 해 주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병실 당번 위생병이 해주는 업무적인 환자보조가 전부였다.나의 담당의사였던 P 군의관은 나에겐 자상하게 신경을 더 써 주었다. 나의 수술후 변해가는 신체 상태를 자세히 설명을 해 주어서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또한 옆 침대에서 있던 장교의 부인이 깎아 주던 사과에 담겨 있는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즉 부인이 남편에게 해 주는 사랑의 따뜻함을 지각하기 시작했고, 담당의사와 조금이라도 더 얘기하고 싶어하는 환자의 약해진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98년 11월)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 병으로 인하여 나에게는 「여자없이 사는 인생이 더 행복한 인생이다.」와, 「나는 절대로 환자가 될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고 유능한 군의관이다」와 같은 교만스러운 생각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아내의 사랑이 충만한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고, 「의사도 조심하지 않으면 환자가 된다. 」 와 「장래가 보장되었다고 너무 자만스러우면 안 되고 , 항상 건강을 조심해야 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로 생활신조가 많이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급성괴사성 충수돌기염으로 인한 천공 , 그리고 이차성 화농성 복막염과 같은 내 생명이 없어질 뻔한 위기에서 나는 구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신(神)은 내가 환자의 아프고 외로운 마음을 생각해 줄 줄 아는 인술이 겸비된 의사가 되라고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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