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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으실 제 괴로움

누구든지 어떤 일을 자기의 책임 하에 수행한 첫 번째의 경험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상당히 당혹스럽고 어려웠던 생애 처음으로 마주친 조산 (助産) 의 경험이 있어 이 글을 쓴다 .

1977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곧 군에 입대했다. 군의관이 되어 군인으로서의 첫발도 디디고 , 의사로서도 첫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군의관으로서의 첫 임지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청양5리였다. 행정적 공식 명칭은 청양5리였지만 그 지역 주민들은 청아리라 불렀다. 청아리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서 직행버스는 서지도 않았고, 완행버스만 섰다. 완행버스 정류장에는 작은 식당겸 가게가 있었고, 자전거수리점과 작은 교회가 그 옆에 있었다. 상주하는 주민들은 거의 다 농업에 종사하였고 꽤 많은 군인가족들이 마을에 같이 살고 있었다.

부임하여 전임군의관과 공식업무의 인수인계에 더불어 숙소까지 물려 쓰게 되었는데 , 그 숙소의 주인은 그 마을의 이장님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의사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군의관 숙소를 마을 주민 서로가 자기 집으로 유치하려 하였다. 군의관 숙소는 그 마을의 의원(醫院)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장님댁에 있던 내 숙소엔 퇴근 후 몇몇 환자들이 늘 찾아 오곤 했다.

부임한 첫달(1977년 5월)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깊은 밤중이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윤 중사의 '부인이 아기를 낳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사실 별로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못한다고 둘러댈 처지도 아니었다. 오밤중에 곤히 자고 있을 조산의 경험이 풍부한 할머니가 어디에 계시는지 조차 알 수도 없고---. 난처하였다. 먼저 집주인인 이장님 부인(60대)을 깨웠다. 도움을 청하였지만 '글쎄 글세' 하며 망설일 뿐이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차근차근 머릿 속에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①산과학(Obstetrics)의 라틴어 어원 Ob-는 by라는 뜻이고 stetrics는 standings의 뜻이라서 By-standings ,즉 산모의 옆에서 자궁과 태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여 그 움직임에 역행하지 말고 같은 방향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②산도(産道)내에서의 태아의 움직임은 진입(進入)------>만출(娩出)의 8단계가 있다.

③아기가 일단 만출 되면 코와 입 속에 있는 각종 분비물을 뽑아내어 아기가 숨쉬기 편하게 해주고 자극을 주어 울린다.

④탯줄을 잘 소독된 깨끗한 가위로 자르고 잘린 탯줄의 면에는 포타딘을 발라 잘 소독한다. 그리고 탯줄의 동맥과 정맥에서 피가 나오지 않도록 굵은 실크로 단단히 묶는다.

⑤아기의 피부에 있는 태지(胎脂)는 더운물로만 닦아내고 절대 알칼리성이 강한 비누는 쓰지 않는다.

⑥태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나오지 않으면 산모의 아랫배를 잘 문질러 준다.

머릿속으로 산과 시험을 앞둔 의대 학생처럼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부대에 전화를 걸어 위생병을 두 명만 나오게 했다. 그리고 나올 때 군의무실의 붕대, 거즈, 실크 등을 많이 갖고 나오라고 지시하였다. 마당에는 태지를 씻길 수 있도록 충분한 물을 데우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의대생 시절에 산과실습엔 흥미가 없었다. 친구 K군은 '분만이 있다' 는 소식만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열심히 달려가는 산부인과 전문의를 지망하던 학생이었으나, 나는 해부병리학을 전공하려 했기 때문에 산과학 분만실실습엔 별로 열의를 내지 않았다. 의대생 시절의 나는 '왜 신(神)은 산모를 저렇게 고생시켜야만 할까?'라는 생각만을 골똘히 했었고, 분만실에 실습생자격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었다. 분만실에 들어가면 만삭의 여인들은 모두 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미련해 보였고, 분만대에서는 아기를 만출(娩出)하지 못하여 하나같이 끙끙거리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괴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산모 주위의 의사, 간호사 등이 열심히 도와주지만, 결국 분만은 산모 자신이 거의 다 홀로 해결해야 하는 힘든 싸움인 것이다. 에덴의 동산에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은 죄값으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여인들의 숙명적인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날 밤만은 '의대생시절에 더 열심히 분만실 실습에 참여했어야 했다.' 고 후회를 많이 했다.

윤 중사와 같이 부인이 고생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에는 역한 냄새가 나는 양수가 터져 흥건히 괴어 있었다. 윤 중사더러 깨끗한 천으로 닦으라고 말하고 부인을 보았더니 아기가 이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머리부터 나와야 할 아기가 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아, 발부터 보일 때에는 어떻게 하지? '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는 듯 했다. 산과 교과서에 어떻게 쓰여 있었는지 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아기가 다 나왔다. 아들이었다. 상당히 작았다. 코와 입속에 있는 분비물을 스포이트로 빨아내고 , 엉덩이를 어설프게 때려서 아기를 울려 놓았다.

그 후 당황하기는 했지만 탯줄, 태반은 그럭저럭 잘 처리했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발부터 나왔어도 머리까지 잘 나온 것 같았다. 조금 후 차츰 나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몇 달만에 나오는 것이냐고 물으니 일곱달만이란다. 아기가 숨은 잘 쉬고 심장도 잘 뛰고 있는데 젖을 빨지 못했다. 미숙아보육기가 생각났다. 부대에 연락하여 서울로 갈 수 있는 차를 불러냈다. 곧 짚차가 한 대 나왔고 미숙아 보육기가 있는 서울의 병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갈말읍--> 운천 --> 포천--> 의정부를 거쳐 미아삼거리의 성가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으나 비어 있는 미숙아 보육기가 없다고 퇴짜를 맞았다. 다시 차를 몰아 한양대부속병원에 가서야 미숙아보육기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체중이 1.7kg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7kg 의 체중이라면 살아날 가망이 많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개월쯤 후 아기는 퇴원을 하여 다시 청아리로 왔고 그로부터 한달 쯤 후 윤 중사는 백일 잔치를 조촐히 했다. 그 다음 해의 돌잔치에도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두돌 잔치에서도 잘 대접받았고, 세돌 잔치가 있기 한 달 전에 전역하여 그 후의 소식은 잘 모른다.

지금 ( 8월 )쯤은 만 21세의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나 있을 윤 중사의 장남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윤 중사는 준위쯤 되어 있겠지. 또 나에게 '낳으실 제 괴로움'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 윤 중사의 부인도 눈에 선하다.

모두 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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