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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물

나는 1993년 12월 27일에 환자였던 친구 김 군으로부터 마지막 선물을 받았다. 이 글을 쓰는 때가 여름 방학 때이니까 약 5년 전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지금은 천국에 있을 김 군이 그리워진다. 여름방학때 같이 지냈던 바닷가에서의 추억이 생각나서 더욱 그립다.

김 군과 나는 중학교 동창생이다. 우리들은 중학교 시절( 1965년 3월 -1968년 2월 )에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모범생들이었다. 김 군과 중학생 때 친해지게 된 연유는 김 군과 저녁 늦게 까지 도서실에서 오래도록 남아 공부를 같이 했었기 때문이다. 김군의 집은 천안시 성환읍이었는데, 성환역에서 천안역까지 기차로 통학하였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과 나는 학교 도서실에 가서 공부하는 단골학생들이었다. 당시 천안의 중학생들은 여름방학이면 집에서 쌀 , 김치, 야영장비, 약간의 용돈을 가지고 서해안 만리포 해수욕장에 가서 며칠씩 지내다 왔다. 지금의 내 수영실력도 이 때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당시의 앨범을 보면 군용천막을 치고 모래밭에 큰 돌을 구해다 놓고 큰 냄비를 걸어 장작불로 밥을 해먹는 사진이 여러 장 있다. 김군과 나는 이런 서해안 야영팀의 주요 멤버였다. 그 후 김 군은 서울의 B 고교를 종업한 후 , D 대 무역학과를 나와 중견무역회사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으나 서로 바빠서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1989년 10월의 일이다. 김 군이 숨을 몰아쉬며 내 사무실의 안락의자에 털썩 앉았다. " 나 좀 살려 주오. "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84년부터 폐결핵으로 진단되어 치료를 시작하였는데 , 그 병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 아내 마저 김 군을 버리고 가출을 하여 홀아비로 어렵게 살게 되었다고 했다. 슬하의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엄마를 찾는다고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이 끊어졌고 ,초등학교 5학년인 딸과 둘이서만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폐결핵으로 숨이 차서 더 못 살겠으니 좀 치료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엑스-선 사진을 찍었다. 엑스-선 사진상 검게 나타나야될 폐 부분의 많은 부분이 하얗게 나타났다. 그 때까지 수천장의 엑스-선 사진을 보았건만 김 군의 사진만큼 나쁜 것은 처음 보았다. 김 군이 눈치챌까 보아서 심각한 표정을 감추고 태연한 척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가래 검사를 하였다. 역시 가느다랗고 짧고 붉은 눈에 익은 결핵균들이 현미경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잘 되겠지 뭐 "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호흡기내과 전문의인 J 교수에게 잘 치료해 달라고 환자를 의뢰하였다. J 교수는 이런 환자를 많이 치료해 본 경험이 있어 별 문제는 없었다. 1990년 10월까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엑스-선 사진 찍고 가래검사 해 가며 그런대로 유지했었다. 상태가 조금 심해지면 2-3일 입원도 하고, 또 좋아지면 퇴원하면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1990년에 김 군의 경제적 후원자로 신사장이 귀인으로 등장하였다. 신사장은 김 군의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플라스틱 사출성형회사의 사장이었다. 신사장은 김 군을 창고관리인으로 고용하였다. 심한 육체노동을 할 수 없는 김 군에게는 적합한 일자리였다. 신사장은 입원비가 필요할 때면 입원비를 대어 주고 , 김 군의 딸 종임이의 학비까지 대어 주었다. 신사장은 김 군의 폐결핵 치료과정에서 아주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다.

1992년에 김 군의 숨차는 증상은 다 없어졌다. 엑스선 사진도 많이 좋아졌다. 안색도 거의 건강한 사람처럼 되었다. 밥맛이 좋아져 아랫배가 약간 나오기 시작했고, 술좌석을 같이 할 때는 콜라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말기 폐결핵 환자를 치료하려면 치료 기간이 약 3년 정도 걸린다는 의사들 끼리의 경험담이 거의 증명되는 듯하였다.

1993년 10월 중순경, 김군은 숨이차서 오래 걸을 수 없다고 자주 호소했다. 엑스-선 사진에서 활동성결핵의 부분은 없었다. 가래에서도 결핵균이 보이지 않았다. 김 군의 폐에는 결핵의 잔재는 다 없어졌고 흉터조직인 섬유화 조직으로 대치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정상 폐조직이 전체 폐의 역할을 해주어야 할 텐데 , 그에는 상당히 못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병원 도서실에 가서 열심히 문헌을 뒤적였다. 「폐결핵환자에 있어서 치료후 발생한 폐 섬유화 반흔외 폐실질부분의 활성화 촉진에 관한 연구」 그리고 「폐결핵 환자에서 섬유성 반흔부분의 폐실질부분으로의 회복에 관한 연구」에 관한 문헌을 열심히 찾았다. 허사였다.


결국 김 군은 중환자실로 들어 갔다. 인공호흡기의 산소 펌프로 동맥혈에 산소를 밀어 넣었다. 중환자실에서 잠시 정신이 들 때, 김 군은 나에게 웃는 낯으로 유언을 했다. " 신 군 , 이 생에서 친구를 만나 참 좋았소. 먼 훗날 같은 곳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는 내가 지금부터 먼저 가서 터를 잘 닦아 놓겠으니 그 때 이생에서 받은 은혜를 보답할께" 무어라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둘러 댔다. " 별 소리를 다 하네,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네, 빨리 회복되어 일반 병실로 가야지 ".

1993년 12월 27일 딸 종임이가 선물을 들고 왔다. 아버지가 보내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 런닝셔츠와 팬티 한 벌이었다. 아버지가 생애 첫 월급을 탔을 때 할아버지께 드렸던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종임이는 말을 했다.

중환자실 간호사로부터 와서 환자의 임종을 지키라고 전화가 왔다. 담당 인턴선생이 인공호흡기의 스위치를 off 로 돌리겠다고 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종임이와 둘이서 김 군의 얼굴을 하얀 시트로 덮었다. 1993년 12월 31일 오후 2시 였다.

나는 김 군이 죽는 날의 '날을 받는' 혜택도 못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기는 94년 1월 3일 쯤 운명하길 원했었다. 되도록 많은 친구들의 영결 속에서 장례를 치르려 했던 바램은 헛된 욕심이었다. 빈소엔 아주 친한 친구 몇 명만 김 군의 영정을 지킬 뿐 , 많은 친구들이 신정 연휴의 시작으로 서울을 떠나고 없었다. 1994년 1월 2일, 김군은 성남시 화장장에서 이생에서의 힘겹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언젠가 훗날 나의 인생이 끝날 때, 나도 김 군처럼 마지막 선물을 누군가에게 주고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옛날 내가 군의관으로서의 생애 첫 월급을 탔을 때 부모님께 해드렸던 속옷으로 ----.

내게 허락된 삶의 모든 부분에서 부지런히 선(善)한 일을 감당하리라 또한 김 군이 닦아놓고 있을 천국의 터로 갈 수 있도록 이생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이 수필은 12월 12일 창작수필사 선정 신인작품상에 선정되어 필자가 수필작가로 등단하게된 작품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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