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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피려던 무렵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면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물방앗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 나온다. 나에게도 상황은 이와 비슷했지만 정작 사랑을 속삭이지는 못한 추억이 있다.

매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면 생각나는 환자가 하나있다. 이 글을 쓰는 때가 여름이니까 꼭 20년 전인 1978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때이다. 1978년 7월에 나는 26세의 군의관 2년차 였다. 당시 육군 ○ 사단 ○ 포병대대 의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이다. 당시의 지경리에는 의원( 醫院)이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군부대마다 군의관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경리 주위에는 부대가 대여섯개 있었으므로 군의관도 대여섯명이 있어 가까이 알고 지냈다. 20년이 지난 요즘에도 만나기만 하면 옛 추억에 젖어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군의관들은 저녁 때면 종종 지경리 약방에서 만나곤 했다. 당시 그 부근의 군인가족들과 민간인들에게 병이 생기면 군의관들이 해결해 주었다. 그런데 군부대의 군수보급품에는 젊은 군인들에게 필요한 약품만이 공급되었다. 그래서 군인가족들과 민간인들을 적절히 치료하려면 민간약품이 필요했었다. 당시에 지경리에는 형제약방이란 약방이 있었는데 그 동네 군의관들이 퇴근 후에 약을 사러 왔었다. 자연스럽게 형제약방은 군의관들의 사랑방과 같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지경리의 옆 동네에는 토성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토성리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경리의 어린이들도 토성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에 23세의 젊은 처녀선생이 전근해 왔다. C 선생이었다. 형제약방의 사랑방에도 자연스럽게 C 선생의 소문이 들려왔다. C선생은 무용교육을 담당했는데 이 C 선생이 이끄는 무용팀은 철원군에서 일등을 하여 춘천에 갔었고 , 그 곳에서도 일등을 하여 강원도의 대표로 서울로 간다는 소문은 그 작은 동네에서는 톱뉴스였다.

그런데 7월 중순의 어느날 , C 선생이 그 학교 용인으로 일하던 아저씨가 운전하던 오토바이의 뒷좌석에 타고 가다가 오른쪽 발 뒤꿈치가 뒷바퀴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오토바이 바퀴살에 발이 끼어 찢어지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신고 있던 하이힐 구두가 엉망이 돼버렸다고하였다. 그런데 대여섯명의 군의관들 중에 내가 주치의가 되었다.

상처는 의외로 컸다. 가볍게 피부만 봉합할 상황이 아니었다. 깊숙한 곳의 연조직(軟組織)을 우선 봉합한 후 , 피부를 봉합하였다. 봉합수술후의 치료가 더 큰 문제였다. 매일 군의무실에 통원하도록 하여 상처를 치료하고 주사도 놓고 먹는 약을 지어주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치료를 더 계속하여야 하는 기간 중의 어느 날이었다. C선생의 목소리가 군대의 비상전화선을 타고 왔다. "군의관님, 오늘부터 방학이 시작되어 저를 태우고 다니던 용인아저씨가 휴가를 갔습니다. . 제가 치료를 받으러 갈 수가 없어요. 오늘은 치료를 건너뛰게 됐네요 . 내일 이틀치 치료를 받으면 되죠? " 난처하였다. 그렇다고 치료를 미룰 수도 없어서 잠시후 마음을 결정하고 얘기하였다. "오늘 퇴근 후에 학교 교사 관사에 들르겠습니다." 퇴근 후 치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잘 꾸리라고 위생병에게 지시하였다.

그 당시 나는 숙소에서 근무처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하였다. 그 날 의무실에서 근무가 끝나고 자전거를 타고 토성초등학교 교사관사로 들어갔다. 그 큰 초등학교가 적막에 싸여 있었다. 모두 다 방학이 시작되어 학교를 떠나고 없었다. 오직 교사관사에 총각군의관인 나와 처녀선생인 C 선생 둘 밖엔 없었을 것이다. 상처치료도 해 주고 , 엉덩이에 근육주사도 놓아 주고, 먹는 약도 주었으니 C 선생은 나에게 보답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갈 것을 부탁했다. 난감하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는 것을 거절하면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고 , 먹고 가자니 그 또한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먹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생겼다. C 선생은 오른쪽 발을 다친 환자라서 왼쪽 발 하나로 콩콩 깨금발을 뛰며 음식을 준비하여야만 했다. 보다 못해 내가 도와주기로 했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 업무까지 맡은 것이다. 저녁밥을 해결하고 커피까지 타 마시고 지경리의 내 숙소로 돌아 왔다. 그 다음날도 똑같이 치료하러 갔다. 그런 날이 약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그 사이 자그마한 지경리, 토성리에서는 소문이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갔다. 「신 군의관과 C 여선생이 결혼식도 안 올리고 토성초등학교 교사관사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신 군의관은 교사관사로 퇴근하여 같이 자고 아침이면 교사관사에서 부대 의무실로 출근한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주위에 어떤 소문이 돌든 나는 C선생을 토요일, 일요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찾아 가서 실밥도 빼고 완벽하게 치료해 주었다.

더 이상 교사관사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러 갔다. 이번에는 C 선생의 어머님께서 강릉으로부터 오셔서 나를 보자고 했다. C 선생의 어머님께서는 내가 그 동안 너무 잘 치료해 주었고 저녁 식사 때마다 주방장 일까지 맡아 해 주어서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다고 하셨다. 그 때엔 C 선생의 상처가 다 나아서 정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C 선생, C선생의 어머니와 내가 시골 교사관사에서 조촐한 회식을 가졌다. 방학 중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관사는 별장과 같이 멋있는 곳이었다.

며칠 후 C선생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C선생의 일생을 치료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딸 대신 어머님이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엔 철저한 독신주의자여서 여자가 없어도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의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만나 물방앗간에서 사랑을 나누던 때와 아주 똑같은 상황이었다. 의사로서의 투철한 직업의식과 독신주의가 없었다면 C 선생은 그대로 나의 집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요즈음도 그 때의 군의관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C 선생과 내가 깊은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며 은근히 마음을 떠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은 , 그 일 또한 지금까지 내가 맺어 온 수많은 「환자와 의사」의 관계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40대 중년이 되어 생의 한 복판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C 선생 . 그녀에게도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그 때의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길 바란다.

1978년의 여름방학 기간은 내 생애에 처음으로 맞이한 메밀꽃 피려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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