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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상자

매년 가을 나는 K씨로부터 사과 한 상자를 선물로 받고 있다. K씨와 나는 특별한 「환자와 의사」의 관계이다. 내가 K씨를 알게 된 것은 K씨의 아들 J씨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1994년 3월 20일 일요일 저녁이었다. 아내의 친구 H씨로 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제가 실수로 휘두른 골프채로 코치 J씨의 눈을 다치게 했어요. 지금 강동성심병원 응급실로 향하고 있으니 어서 병원 응급실로 나와 주세요."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연속극을 보면서 푸근히 쉬고 있던 시간이었지만, 다시 병원에 들어와야만 했다. 응급실에서 본 J씨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눈주위 연조직(軟組織)에 1cm정도의 찢어진 상처가 있었는데, 깊지는 않았다. 당직 성형외과 의사가 수행한 열창봉합술(裂創縫合術)의 작은 수술은 잘 되어 2주후 완쾌되었다.

그 일로부터 4개월이 흘러 갔다. J씨는 나에게서 주치의로서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아버지 K씨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94년 8월 17일 K씨와 나는 첫인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만 68세(1926년 생)인 K씨는 일견 중병(重病)이 있는 안색( 顔色 )이었다. 며칠 전부터 피가 섞인 대변이 나온다는 것이 문제였다. 담당 내과의사에게 검사를 부탁했다. 며칠 후에 나온 최종진단은 상당히 중한 병이었다 . 〔 대장 용종증에 합병된 대장암 및 총수담관 유두상 선암종 〕

이 병은 대장속에 용종이 생겨나는 병이다. 용종(茸腫)이란 사슴뿔처럼 길고 가느다란 병적인 조직이 돌출되어 종양을 만드는데 이 종양중의 일부가 악성으로 바뀌어 암조직이 생겨난다. 또한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이 십이지장으로 흘러가는 관을 수담관이라 하는데 십이지장으로 통하기 직전의 가장 직경이 큰 부분을 총수담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젖꼭지형태(유두상 :乳頭狀) 의 돌출되는 암조직이 생긴 것이다 . 대장용종증에 총수담관암이 합병되면 가드너 증후군(Gardner's syndrome) 이라 명명된다. 이 병은 가드너라는 병리의사가 최초로 이름붙인 병인데 대개 진단받고 오래 살지 못하는 병으로 병리학교과서에 쓰여져 있다.

치료는 전체의 대장 (大腸)을 수술해 내야하는 대장전적출술 ( 大腸全摘出術 )과 총수담관 선암종제거술이다. 대장을 전부 적출해내면 항문이 원래의 위치에서 없어지고, 인공항문을 왼쪽 아랫배에 만들어 준다. 이런 수술을 받은 환자는 그 인공항문의 구멍에 비닐봉지를 붙이고 , 그 비닐봉지에 담겨진 대변을 화장실에 갔다 버려야만 되는 등,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K씨에게는 이런 모든 것을 얘기해 줄 수는 없었기에 대충 설명해주고 수술을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설명하며 수술을 받으라고 권했다. K씨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기의 몸을 알아서 잘 수술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애원을 하는 듯한 K씨의 눈 속에는 반짝이는 액체가 있었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아들인 J씨와 계속 친하게 지내달라' 는 유언과 같은 부탁과 함께. 내가 의대생 시절에 들었던 L 교수님의 '의사의 윤리'의 강의내용을 생각해 내었다. '의사는 독수리와 같은 날카로운 눈 , 사자와 같은 단호한 결단력, 여인과 같은 부드럽고 섬세한 손' 이 있어야 하며 , 경우에 따라서 세 가지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꺼내서 쓰라고 하셨다. 당시의 시점에서는 그래도 ' 사자와 같은 단호한 결단력' 이 필요했었다.

일반외과 P교수의 집도로 수행된 수술은 1mm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끝났다 (94년 8월 23일). 수술후 K씨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젊은 환자처럼 인공항문에 적응을 잘 하였다. 처음의 며칠동안은 왼쪽 아랫배로 흘러나오는 대변을 보고 심한 우울증에 빠졌었지만 주위 가족들의 위로와 K씨의 굳은 의지로 곧 극복하였다. 안색도 나날이 좋아져 수술 후 한달이 되는 날 퇴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퇴원 후 그럭저럭 잘 지내게 되었다고 아들인 J씨를 통하여 안부를 듣고 있던 중에 집으로 사과 한 상자가 배달되었다. 「보내는 사람 : 경북 영일군 의창면 매산리 K 」의 꼬리표가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아들 J씨에게 선물을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차 전화를 걸었다. J씨의 말 " 신선생님, 아버님께서 손수 농사 지으신 마지막 사과라서 한 상자 보내는 것이니 맛있게 드십시오. 이승에서 드리는 정성어린 마지막 선물로 받아 주십시오." 도저히 이 사과들을 깎아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나 며칠 후 썩어가기 시작할 무렵, 아무 사연도 모르는 아들 녀석들이 맛있게 먹어서 결국엔 다 없어지고 말았다.

그 다음 해(95년) 가을, K씨가 보낸 사과 한 상자가 또 택배편으로 집에 도착했다. 이젠 기력도 작년보다 좋아져서, 사과의 크기와 질도 매우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 사과 한 상자는 정말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정성어린 선물이 될 것이라는 인사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다음 해(96년)에도, 또 그 다음 해(97년)에도 영일군 의창면의 사과 한 상자가 집으로 도착되었다. 매번 이승에서의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라는 인사와 함께.

이제 98년 8월 23일이면 수술후 만 4년이 된다. 아무리 고수준 악성의 암환자라도 수술후 5년만 버티면 그 암으로 사망할 확률은 제로라고 병리학 교과서에는 적혀 있다. K씨가 99년 8월 23일 까지 재발이 안 될 것이라고 믿고 기원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에서 허락한 삶을 끝까지 만끽하시라고 마음속으로 전하고 있다.

K 씨가 가드너 증후군에 걸리고도 4년간이나 살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아마 현대의학 책에는 쓰여져 있지 않은 어떤 면역력의 증강이 있을 것이다. 이 면역력의 증강 , 특히 암세포들과 백혈구와의 투쟁에서 백혈구들이 암세포들을 물리칠 수 있는 어떤 힘이 생겨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닥치는 최후의 그 날까지 아들 J씨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사과농사에 대한 끝없는 정열, 그리고 주치의에게 사과 한 상자를 보내야 한다는 보답의 책임감이 어우러져 발생한 엔돌핀과 비슷한 화학물질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이번 여름휴가에는 K 씨댁을 찾아가서 5년 생존의 마지막 1년의 건재를 기원하려고 계획을 짜고 있다. 무엇보다도 K씨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있는 사과를 나의 육안(肉眼)으로 확인하고 싶다.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주어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 한다.' 는 K씨의 신념은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는다'의 인생관이 아닐까 생각되어 한층 더 숙연해 진다.

이 수필은 12월 12일 창작수필사 선정 신인작품상에 선정되어 필자가 수필작가로 등단하게된 작품입니다. 아울러 한림대학교 재단 홍보팀에서 발간하는 성심월보 12월호에도 전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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